칼럼 · 고전 읽기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다
화엄경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따로 있다고 여긴 나와 세계가 사실은 어떻게 서로 기대어 드러나는지 함께 묻는다
아침에 마신 커피 한 잔을 떠올려 보자.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나무를 길렀고, 누군가 열매를 땄고, 배와 트럭이 그것을 옮겼다. 가게의 불을 켠 사람, 컵을 만든 사람, 물을 끌어온 길도 있다. 나는 그저 한 잔을 샀을 뿐인데, 그 한 잔에는 내가 다 셀 수 없는 손과 시간이 들어 있다.
이 장면은 흔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가면 질문이 하나 남는다. 커피만 그런가. 나라는 사람도 그런가.
화엄경은 바로 그 질문을 아주 크게 펼쳐 놓은 경전이다.
나는 정말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가. 아니면 수많은 것과 기대어 지금 여기 드러나 있는가.
너무 커서 처음엔 길을 잃는 경전
화엄경의 정식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 연재가 기본으로 읽는 판본은 여든 권, 서른아홉 품에 이른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처럼 한자리에서 다 읽기는 어렵다.
처음 펼치면 낯선 장면이 쏟아진다. 보배로 꾸민 세계, 끝없이 퍼지는 빛, 털끝 하나에 들어 있는 여러 세계, 셀 수 없이 많은 보살의 이름. 오늘의 독자에게는 화려한 그림책처럼, 때로는 너무 긴 목록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연재는 전부를 옮기지 않는다. 다락뷰가 고른 열두 대목을 여섯 편에 나누어 쉬운 말로 읽고, 그 뒤에 생활의 주제로 이어 간다. 고른 대목은 전체를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큰 숲에 들어가는 몇 개의 오솔길은 될 수 있다.
작은 것 안에 큰 세계가 있다는 말
화엄경에는 크기에 관한 상식을 흔드는 문장이 자주 나온다. 아주 작은 티끌 하나에 온 세계가 들어 있고, 털끝 하나에 여러 세계가 드러난다고 한다. 광명각품에서는 빛이 세계를 차례로 비추는 장면 속에서, 하나 안에서 셀 수 없는 것을 알고 셀 수 없는 것 안에서 하나를 안다고 노래한다.
이것을 물건의 부피에 관한 설명으로 읽으면 곧 막힌다. 티끌은 여전히 작고, 세계는 여전히 크다. 경전이 묻는 것은 다른 쪽이다. 하나는 정말 하나만으로 하나인가. 작은 것은 큰 것과 끊어진 채 작기만 한가.
커피 한 잔을 다시 보자. 한 잔은 작다. 그러나 그 한 잔이 '이 한 잔'이 되기 위해 기대고 있는 것을 따라가면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작은 것 하나를 깊이 보면 큰 것이 그 안에 비친다. 화엄을 읽어 온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고 정리했다.
크기는 존재의 깊이를 다 말해 주지 않는다.
서로 기대어 생겨난다
보살문명품에서 문수보살은 여러 보살에게 묻는다. 마음의 성품은 하나라는데 왜 세상은 이렇게 갖가지로 다르게 보이는가. 지은 행위와 받는 결과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이어지는 대답들은 한 가지로 모인다. 무엇도 혼자 힘으로, 혼자만의 고정된 성품으로 서 있지 않다. 원인과 조건이 만나 일이 생기고, 조건이 바뀌면 일도 바뀐다. 불교는 이것을 연기(緣起), 곧 '서로 기대어 생겨남'이라 부른다.
이 말은 생활에서 두 가지를 가르쳐 준다.
- 성공을 나 하나의 이야기로만 쓰지 않는다. 내 노력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노력이 열매 맺게 한 사람과 때와 자리도 있었다.
- 실패를 내 탓 하나로만 쓰지 않는다. 내가 바꿀 수 있었던 조건과 바꿀 수 없었던 조건을 나누어 보면, 자책 대신 다음 걸음이 보인다.
서로 기대어 있다는 말은 책임을 흐리는 말이 아니다. 내가 놓인 조건을 정확히 보고, 그 안에서 내 몫을 분명히 하자는 말이다.
마음은 화가와 같다
야마궁중게찬품에는 화엄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게송이 있다.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서 온갖 세상을 그려 낸다. 그리고 이렇게 맺는다.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다면 법계의 성품을 보라,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이 말은 자주 오해된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 된다', 혹은 반대로 '나쁜 일을 겪었다면 네 마음 탓이다'라는 말로 쓰이곤 한다.
다락뷰는 둘 다 따르지 않는다. 같은 비를 맞고도 누구는 시원하다 하고 누구는 괴롭다 한다. 같은 사람을 두고도 내가 그린 그림에 따라 그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마음은 세계가 내게 드러나는 방식을 짓는다. 그렇다고 마음 하나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세상의 사건을 혼자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게송도 바로 앞에서 마음과 부처와 살아 있는 존재들을 함께 말한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면서, 그 그림 속에 함께 들어 있는 존재다.
선재의 길 — 배움은 만남 속에서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은 긴 여행 이야기다. 선재라는 젊은이가 문수보살의 권유로 길을 떠나, 전통적으로 쉰셋이라 세는 여러 스승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 스승들은 한 모습이 아니다. 수행자도 있지만 장사하는 사람, 집안의 어른, 젊은 여성, 뱃사공도 있다. 선재는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한다.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그리고 한 사람에게서 배운 것을 들고 다음 사람에게 간다.
이 이야기에서 배움은 혼자 책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 무엇을 묻느냐에 따라 길이 열린다. 직함이나 겉모습보다 그 사람이 보여 주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이 선재가 보여 주는 태도다.
바람을 함께의 실천으로
화엄경에는 여든 권 판본 말고도 따로 전하는 마흔 권 판본이 있다. 그 마지막 권에 보현보살의 열 가지 큰 바람을 담은 보현행원품이 있다. 공경하고, 찬탄하고, 잘못을 돌아보고, 남의 좋은 일을 함께 기뻐하고, 살아 있는 존재들의 처지에 맞춰 함께하고, 닦은 좋은 것을 모두에게 돌린다.
이 바람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을 얻겠다는 바람이 아니라 어떻게 관계하겠다는 바람이다. 화엄경의 큰 세계관은 결국 이 작은 몸짓으로 돌아온다.
한 차원의 최고가 더 높은 차원에서는 기초라면
여기서부터는 경전 본문이 아니라 다락뷰의 읽기다.
다락뷰의 세계관에서 빛은 현실 차원에서 '최상위 에너지 단위'로 이해된다. 그리고 상위 차원, 곧 5차원·6차원 같은 자리에서는 존재와 정보를 이루는 최소·기본 단위가 된다고 본다. 현실 차원에서 1비트가 켜짐과 꺼짐 중 하나로 정보를 나타내듯, 상위 차원에서는 빛이 그런 기본 단위 역할을 한다는 관점이다.
한 차원에서의 최고가, 더 높은 차원에서는 시작이 된다.
다락뷰는 화엄경의 작은 것과 큰 것, 빛과 비춤을 이 관점과 나란히 읽는다. 지금 내 눈에 가장 큰 것이 전체의 끝이 아닐 수 있다. 지금 내 눈에 가장 작은 것이 더 큰 질서의 한 바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크기와 한계로 나와 세계를 다 재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다락뷰가 택한 세계관이다. '최상위 에너지 단위'는 다락뷰의 말이지 물리학의 단위 이름이 아니다. 경전에 차원 번호나 비트가 적혀 있다는 주장도 아니고, 경전의 광명을 광자로 바꾸어 읽자는 말도 아니다. 경전의 문장과 다락뷰의 해석은 이 연재 내내 자리를 나누어 둔다.
화엄경에서 찾은 진짜 연결
다락뷰는 이 읽기를 '화엄경에서 찾은 진짜 연결'이라 부른다.
여기서 연결은 인맥을 넓히는 기술이 아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은 일도 있겠지만, 화엄경이 묻는 것은 그보다 앞선다. 나는 무엇과 기대어 존재하는가. 내 말과 행동은 누구에게 어떻게 닿는가.
이 질문은 명식을 읽을 때도 쓸모가 있다. 사주나 자미의 명식은 한 사람이 가진 결과 흐름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진공 속에 있지 않다. 가족과 일터와 때와 자리가 함께 있다. 다락뷰가 명식을 '정해진 판결'로 쓰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명식 밖의 조건까지 함께 볼 때 같은 결도 다르게 펼쳐진다.
연결된다는 말을 모든 것을 떠맡으라는 말로 읽지도 않는다. 서로 이어져 있다고 해서 해로운 관계를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져 있기 때문에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끊을지 더 분명히 볼 수 있다.
이 연재를 읽는 길
이 연재는 이렇게 이어진다.
- 쉬운 화엄경 1~6: 작은 것과 큰 것, 조건과 일상, 믿음과 첫 마음, 마음과 세계, 선재의 배움, 보현의 바람을 차례로 읽는다.
- 보론 두 편: 신라의 의상 대사가 화엄을 210자로 접은 「법성게」, 화엄교학이 아낀 비유 「인드라망」을 따로 소개한다. 둘 다 경전 본문이 아니라 화엄을 읽어 온 사람들의 정리다.
- 주제 칼럼: 일·돈·관계·배움·습관 같은 생활 자리에서 '진짜 연결'을 묻는다.
이 연재는 불교를 믿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열려 있는 질문을 경전에서 빌려 올 뿐이다.
오늘은 한 가지만 해 보자. 지금 내 곁에 있는 물건 하나를 골라, 그것이 내 손에 오기까지 기댄 것을 다섯 가지만 적어 본다. 다 적고 나면 다시 묻는다.
나는 무엇에 기대어 오늘 여기 있는가.
그 목록이 생각보다 길다면, 화엄경 읽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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