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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심경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몸과 느낌, 감각과 앎, 걸림과 두려움까지 260자의 짧은 경전이 '나'를 어떻게 비추어 보는지 따라가 본다.

'모든 것은 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두 갈래로 갈린다. 한쪽은 가벼워진다. 붙들고 있던 걱정도 결국 비어 있는 것이라면 조금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다른 한쪽은 허전해진다. 내가 아끼던 사람과 해온 일, 지금 느끼는 기쁨까지 다 비어 있다면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나.

반야심경은 260자로 된 짧은 경전이다. 한국에서는 절의 예불과 여러 의식에서 가장 자주 소리 내어 읽힌다. 그만큼 익숙하지만, 정작 '비어 있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차분히 따라가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글은 그 첫걸음이다. 먼저 하나만 붙들고 시작하자.

비어 있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관자재보살이 본 것

반야심경은 한 장면으로 문을 연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지혜를 실천하다가, 몸과 마음을 이루는 다섯 묶음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았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건너갔다.

다섯 묶음, 곧 오온(五蘊)은 이렇다. 몸을 비롯한 물질적 측면인 색(色), 즐거움·괴로움·중립으로 오는 느낌인 수(受), 대상을 알아보고 구별하는 작용인 상(想), 의지와 성향을 포함한 여러 형성 작용인 행(行), 대상을 알아차리는 인식 작용인 식(識).

흥미로운 것은 순서다. 경전은 관자재보살이 무엇을 새로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있던 것을 다르게 보았다고 말한다. 그 봄이 괴로움을 건너는 길이 되었다.

우리는 보통 이 다섯을 한 단어로 묶어 부른다. '나'. 기분이 가라앉으면 '나는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한 번 실수하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된다. 느낌 하나, 판단 하나가 어느새 존재 전체의 이름이 된다. 반야심경은 그 묶음을 풀어서 보게 한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이어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이 나온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다. 느낌과 알아봄, 형성 작용과 인식도 이와 같다.

여기서 다락뷰는 공을 다른 조건과 무관하게 홀로 성립하는 고정된 본성이 없다는 뜻으로 읽는다. 책상 하나도 나무와 만든 손, 놓인 자리와 쓰는 사람 사이에서 지금의 책상으로 있다. 그 관계를 떠나 홀로 서 있는 '책상 그 자체'를 찾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책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만지고, 그 위에서 글을 쓴다.

경전이 '색이 곧 공'에서 멈추지 않고 '공이 곧 색'을 바로 붙인 까닭도 여기 있다. 현실을 걷어내고 그 뒤에 숨은 진짜 공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거꾸로 손에 잡히는 모양만이 존재의 전부라고 못 박지도 않는다. 공을 읽고 돌아올 자리는 현실 바깥이 아니라 현실 한가운데다.

다락뷰는 공을 두 겹으로 읽는다. 하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조건이 모여 생기고, 조건이 바뀌면 함께 바뀐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가르침(제행무상)에서 보면 이것이 공의 바른 뜻이다. 다른 하나는 집착할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앞의 것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라면, 이것은 무언가를 꽉 붙잡고 있는 손에게 하는 말이다. 붙잡아 둘 '그것 자체'가 본래 없으니, 손을 펴도 잃는 것이 없다. 깨어남에 가까워지려는 쪽에서는 이 두 번째 뜻이 더 직접 와닿는다.

그래서 공은 비어 있음이라기보다 열려 있음에 가깝다. 용수는 《중론》에서 공의 이치가 있기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무엇도 바뀌지 못하고, 새로 생겨나지도, 서로 이어지지도 못한다. 굳어 있지 않기에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질 수 있기에 새로 될 수 있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쪽을 가리킨다.

세계를 나누는 기준까지

반야심경의 물음은 '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법, 곧 모든 현상의 공한 모습은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눈·귀·코·혀·몸·마음, 그것들이 만나는 형상·소리·냄새·맛·감촉·마음의 대상, 그리고 그 사이의 알아차림까지 하나하나 부르며 '없다'고 한다.

이 '없다'를 눈을 감고 귀를 막으라는 말로 들으면 곤란하다. 늘고 주는 것은 실제로 있다. 통장의 숫자도, 한 달 동안 쓴 글의 수도 변한다. 반야심경이 묻는 것은 그 변화를 '나는 줄어든 사람'이라는 고정된 본성으로 붙잡는 습관이다. 내가 본 것과, 그러므로 세계를 다 안다는 확신 사이에 틈이 있는지 보는 것이다.

가르침도, 지혜도 붙잡지 않는다

경전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열두 고리도, 괴로움과 그 원인과 소멸과 길이라는 네 가지 진리도 공 가운데에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

처음 읽으면 당황스럽다. 가르침도 지혜도 없다면 왜 경전을 읽는가. 다락뷰는 이 대목을, 나를 도운 설명마저 나를 가두는 울타리가 되지 않게 하는 말로 읽는다. 지도는 길을 찾는 데 쓸모가 있다. 그러나 지도에 없는 공사 구간을 만났을 때 지도만 보고 걷는 사람은 넘어진다.

다락뷰는 명식을 다룰 때도 이 물음을 놓지 않는다. 사주나 자미두수로 나의 기질과 흐름을 살펴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명식이니 나는 여기까지'라는 판결로 자신을 닫지는 않는다. 나를 이해하는 도구와 나를 끝까지 규정하는 틀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지혜도 없다'의 지(智)는 무식하다는 뜻의 무지(無知)가 아니다. 배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소유한 나를 마지막 기준으로 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반야심경은 '얻을 것이 없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로 다음 문장이 이렇게 이어진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지혜에 의지하고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고, 뒤집힌 생각과 헛된 상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이른다.

얻음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실천이 시작된다. 두려움의 바닥에는 종종 '이것을 잃으면 나는 끝'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다. 거절당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실패하면 존재가 취소된다는 조건이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바깥의 모든 장애가 사라진다는 약속이 아니다. 내가 걸어둔 그 조건을 알아보고 풀어놓는 일에 가깝다.

경전은 이렇게 맺는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묘하고 크게 밝은 주문이며, 그보다 높은 것이 없고 견줄 것이 없다. 그리고 한국의 절에서는 이 주문을 이렇게 읽는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다락뷰는 이 소리를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암호로 쓰지 않는다. 앞의 260자를 지나온 사람이 마지막에 함께 소리 내는 맺음으로 읽는다. 신앙으로 독송하는 마음도, 경전의 흐름을 살피며 읽는 마음도 모두 존중한다.

한 차원의 최고가 더 높은 차원에서는 기초라면

다락뷰는 이 물음을 마음가짐에만 가두지 않는다. 나와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지금 내가 쓰는 기준이 존재 전체의 마지막 기준인가.

다락뷰의 세계관에서 빛은 현실 차원의 '최상위 에너지 단위'로 이해되며, 상위 차원, 곧 5차원·6차원 등에서는 존재와 정보를 이루는 최소·기본 단위가 된다. 현실 차원에서 1비트가 On/Off 중 하나의 값으로 정보를 나타내듯, 상위 차원에서는 빛이 그런 기본 단위 역할을 한다고 본다.

한 차원에서의 최고가, 더 높은 차원에서는 시작이 된다.​

이것은 다락뷰가 받아들인 해석의 전제다. 경전의 풀이도 표준 물리학의 단위도 아니다. 무엇보다 다락뷰는 색즉시공을 '물질이 빛이나 에너지로 바뀐다'는 공식으로 옮기지 않는다. 색을 낮은 차원, 공을 높은 차원으로 나누는 순간, 반야심경이 애써 이어 붙인 색과 공을 다시 두 세계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 관점이 반야심경과 만나는 자리는 다른 데 있다. 지금 익숙한 크기와 한계로 존재 전체를 다 설명했다고 여기지 않는 것. 눈앞의 삶을 가짜로 치우지도, 눈앞의 삶만으로 세계의 문을 닫지도 않는 것.

반야심경에서 찾은 진짜 자유

금강경이 붙들고 있는 '나'와 '얻음'을 돌아보게 했다면, 반야심경은 그 '나'를 이루는 몸과 느낌, 생각과 의지, 앎까지 비추어 보게 한다. 다락뷰는 이 읽기를 ​'반야심경에서 찾은 진짜 자유'​라고 부른다.

그 자유는 싫은 느낌이 다시 오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는 힘도 아니다. 느낌이 오면 느낌을 인정하고, 생각이 오면 생각을 알아보되, 그 가운데 하나를 영원한 나로 확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좋은 날에도 그 날을 나의 전부로 삼지 않고, 힘든 날에도 그 날로 나를 판결하지 않는다.

이 연재는 반야심경을 네 편의 「쉬운 반야심경」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오온과 색즉시공, 세계를 나누는 기준, 가르침과 지혜를 붙잡지 않는 법, 걸림 없는 마음과 주문의 순서다. 그 사이사이에 생활의 장면에서 한 구절씩 꺼내 읽는 주제 칼럼이 이어진다.

오늘은 한 문장만 적어보아도 좋다.

나는 __________ 때문에 내가 싫어진다.

빈칸을 채웠다면 다시 물어보자. 그것은 내가 겪은 일인가, 아니면 내가 겪은 일에 붙인 이름인가.

반야심경 읽기는 그 둘 사이에 작은 틈을 내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정되지 않았기에, 다르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근거

오온개공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색즉시공 —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지역무득 —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용수 《중론》​(반야심경 본문이 아니라 공을 풀이한 논서) —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이유공의고 일체법득성)

심무가애 —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반야바라밀다주 —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다락뷰의 반야심경 읽기 · 대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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