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고전 읽기
법성게 — 의상이 210자로 접은 화엄
신라의 의상 대사가 화엄경의 뜻을 일곱 글자 서른 줄에 담았다. 하나와 여럿, 티끌과 온 세계, 한 생각과 긴 시간을 쉬운 말로 풀어 읽는다
긴 책을 다 읽고 나서 누군가 '그래서 한마디로 뭐야?' 하고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줄이면 빠지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 대사는 그 어려운 일을 했다. 방대한 화엄경의 뜻을 일곱 글자씩 서른 줄, 모두 210자에 접어 넣었다. 그것이 법성게(法性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법성게는 화엄경 본문이 아니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지엄 스님에게 화엄을 배운 뒤, 예순 권 화엄경을 바탕으로 그 뜻을 정리해 지은 게송이다. 의상은 이 210자를 도장처럼 꺾이며 이어지는 그림 위에 한 줄로 적었고, 그 그림과 풀이를 함께 묶어 '화엄일승법계도'라 불렀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절에서 법성게는 널리 독송된다.
이 글은 법성게를 경전처럼 받들라고 권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큰 경전을 깊이 읽고 남긴 요약으로서, 그 생각의 길을 따라가 본다.
첫머리 — 모든 것의 바탕은 둘로 갈라지지 않는다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쉬운 말로 풀면 이렇다.
모든 것의 참된 성품은 두루 원만하게 어우러져 둘로 갈라진 모습이 없다. 모든 것은 본래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 이름도 모습도 없어 모든 분별을 넘어서니,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길로는 닿지 않는다.
첫 줄의 '원융(圓融)'은 둥글게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쳐 깨지지 않고, 각자의 모습을 지닌 채 하나로 어울린다. 법성게 전체가 이 한 단어를 풀어 가는 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 —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참된 성품은 깊고 미묘하여, 제 성품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 줄은 앞 줄과 짝을 이룬다. 바탕은 고요하지만 그 바탕이 굳어 있지는 않다. 조건을 만나면 그 조건에 맞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어지는 쉬운 화엄경 2에서 읽을 '무엇도 혼자 서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서는 한 줄로 접혀 있다.
셋째 — 하나 안에 모두, 모두 안에 하나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쉬운 말로 풀면 이렇다.
하나 안에 모두가 있고 여럿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모두이고 여럿이 곧 하나다. 티끌 하나 안에 온 세계가 들어 있고, 모든 티끌이 다 그러하다.
법성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목이다. '하나 안에 모두'는 쉬운 화엄경 1에서 읽은 광명각품의 '하나 안에서 셀 수 없는 것을 안다'와 닿아 있다.
이 말을 '모든 것이 똑같다'로 읽지 않는다. 하나는 여전히 하나이고, 여럿은 여전히 여럿이다. 다만 하나는 여럿과 끊어진 채로 하나가 아니고, 여럿은 하나하나를 지운 채로 여럿이 아니다. 서로를 품고 서로에게 기대어 각자가 된다.
넷째 — 한 생각과 긴 시간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이 곧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곧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이다. 여러 시간이 서로 맞물려 있지만,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저마다 또렷하다.
앞에서 공간의 크고 작음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시간의 길고 짧음을 말한다. 지금의 한 생각 안에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이 함께 비친다. 그런데도 시간이 뭉개지지 않는다.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또렷하다.
다섯째 — 처음 마음을 낼 때 이미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처음 마음을 낼 때가 곧 바른 깨어남이요, 나고 죽는 괴로움과 고요한 벗어남이 늘 함께 어우러져 있다.
쉬운 화엄경 3에서 읽을 '처음 마음'이 여기서는 아주 크게 말해진다. 처음 낸 마음은 끝에서 멀리 떨어진 출발점이 아니라, 이미 끝과 맞닿아 있다. 의상은 이것을 화엄경의 여러 대목에서 읽어 냈다.
이 줄을 '시작만 하면 다 된 것'으로 읽지 않는다. 처음 마음의 방향이 그만큼 귀하다는 말이다. 길을 걸어야 하는 일은 그대로 남는다.
뒷부분 — 바탕으로 돌아가는 길
법성게의 뒷부분은 깨달은 이의 넓은 경계와, 수행하는 사람이 바탕으로 돌아가는 길을 노래한다. 깨달은 이의 고요한 집중 속에서 뜻대로 되는 보배가 비처럼 내려 허공을 채우고, 살아 있는 존재들은 저마다 그릇만큼 그 이로움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니 수행하는 이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며, 헛된 생각을 쉬지 않고는 이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줄은 이렇다.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 그것을 부처라 이름한다.
첫 줄에서 '모든 것은 본래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고 시작한 게송이, 마지막 줄에서 '움직이지 않는 그것'으로 돌아온다. 210자가 둥글게 한 바퀴를 돈다. 법계도 그림에서 이 게송이 한가운데서 시작해 꺾이고 꺾이다 다시 한가운데로 돌아오는 것도 같은 뜻으로 읽혀 왔다.
다락뷰의 읽기 — 줄인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법성게를 읽으면 줄이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210자는 화엄경 전체에 비하면 티끌만 하다. 그런데 법성게 스스로가 말하듯, 티끌 하나에 온 세계가 들어 있다. 잘 줄인 글은 큰 것을 버린 것이 아니라 큰 것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 된다.
생활에서도 그렇다. 하루를 한 줄로 적는 일기, 한 해를 한 문장으로 돌아보는 일은 작다. 그러나 그 한 줄이 어떤 장면을 고르고 어떤 말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하루와 한 해의 모습이 비친다.
다락뷰의 세계관에서 한 차원의 최고는 더 높은 차원에서 기본 단위가 된다. 법성게의 '하나가 곧 모두'를 다락뷰는 이 관점과 나란히 놓고 읽는다. 작은 단위가 큰 전체를 품고, 큰 전체는 작은 단위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다락뷰의 해석이며, 의상이 차원을 말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작은 것 하나를 제대로 보는 일은, 큰 것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큰 것에 들어가는 문이다.
오늘 해볼 한 가지
이번 주를 일곱 글자로 적어 본다. 많은 것이 빠질 것이다. 다 적고 나면 무엇을 남겼는지, 그 일곱 글자가 한 주의 어떤 모습을 비추는지 살펴본다.
근거
- 법성게(의상, 화엄일승법계도) —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 법성게(의상, 화엄일승법계도) —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 법성게는 화엄경 본문이 아니라, 의상 대사가 60권 화엄경을 바탕으로 지은 게송이다.
다음 읽기: 「쉬운 화엄경 2 — 관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다락뷰의 화엄경 읽기 · 보론 1





